数学と語学 수학과 어학
寺田寅彦 테라다 토라히코
어느 입학시험 성적표에 관하여 수학 점수와 어학 점수의 상관(correlation)을 조사해본 적이 있다. 각 응시자의 두 과목 점수를 X Y로 해서 도면에 plot해보면 물론 점은 상당히 불규칙하게 퍼진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X=Y로 표시되는 직선 근처에 점의 밀도가 높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개중에는 X Y 중의 하나가 100점에 가깝고 다른 하나의 수치는 작은 사례도 있기는 있지만 다수를 보면 양자 간에는 통계적 상관이 있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 기억한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국 머리가 좋은 사람이 둘다 점수가 좋다는 것이 가장 probable하다고 해버리면 그만이기는 하다. 하지만 어쩌면 이 두 과목은 학습하는 데에 필요한 두뇌의 작용 방식의 면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공통된 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하나의 문제가 된다.
간단히 생각하면 수학은 순수한 이론의 계통이고 어학은 우연한 것의 우연한 모임인 것 처럼 보인다. 전자는 기계적인 암기가 전혀 불필요하고 후자는 규칙도 아무것도 없이 단지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수학은 알고 보면 일종의 어학 같은 것이다. 여러가지 begriff를 여러 가지 기호・부호로 나타내고 일종의 문법에 따라 배열하면, 그것이 수리의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단어가 되고 짓는 문장이 된다. 물론 그 언어의 내용은 우리의 일상 언어와는 꽤 느낌이 다른 것이다. 하지만 몇십백억 년 후의 인간의 언어가 전부 수학식의 연속과 비슷한 것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공상을 아주 약간 develop해서 생각해 보면 이 비유가 반드시 부당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우리가 말하기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생각하기 위한 도구이다. 언어 없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동물심리학자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길짐승이나 날짐승이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생각의 식을 구성하기 위한 기호를 가지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농아자는 음향 언어가 없지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동작 언어를 이미 갖추고 있다.
수학에서는 최초에 약간의 공리전제를 두고 이후에는 논리에 따라서 전제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분석하고 분석한 것을 짜 맞춰 가는데, 우리가 언어에 의해서 생각을 옮겨가는 과정도 이것과 상당히 닮은 점이 많다. 물론 수학의 공리나 논리는 극히 간단명료하고 사용되는 개념도 명확히 제정되어 있는 반면, 언어에 의한 사고의 경우에는 이러한 모든 것이 복잡하고 다의적이기 때문에, 언뜻 비슷한 전제에서 다양한 결론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제의 수가 매우 많아서 완전히 동일한 전제군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그래도 두 명의 인간이 오랫동안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두 사람의 사고방식이 닮게 된다. 친한 친구끼리 길을 걷고 있으면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마당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가 동화하면 완전히 같은 동작을 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방식에도 일정한 공식과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공식에서 심하게 멀어지면 바보나 미치광이나 천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공상은 아무래도 좋고, 평범하게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수학과 어학은 학습 방법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요소가 있는 것 같다.
어학을 마스터하려면 먼저 단어를 외우고 문법을 외우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대강 이해하고 암기한 정도로는 스스로 말할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오랜 연습에 의하여 그것을 완전히 체득하여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로 쓸 수 있다.
수학도 단지 교과서나 강의노트에 있는 내용을 전부 이해한 것만으로는 거의 소용이 없다. 결국 여러 가지 부호의 의미를 모두 철저하게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공식을 상당한 정도까지 암기해서 한번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실제 계산은 곤란하다.
그래서 어학도 수학도 일기가성으로 마스터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하면, 싫증내거나 서두르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이 적어도 '필요조건'의 하나이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아무리 단어를 많이 외우고 문법을 암기해도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수학을 숙달하더라도 반드시 훌륭하고 독창적인 논문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수학을 일종의 국어로 보더라도 그것은 매우 특별한 국어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고등수학이라면 마치 산스크리트나 히브리어와 같이 보통사람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는 것이다. 쓸모가 없으니 배우지 않고, 배우지 않으니 굉장히 어렵고 두려우며 다가가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것을 숙달한 사람이 굉장히 대단한 것으로 보이고 그것으로 쓰인 문장이 매우 거룩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읽어 보면 사실 별것 아닌 시시한 것이라고 하여도 숭고한 불경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있다. 문법책의 권말에 있는 작문이나 번역의 예제와 동격인 응용수학 논문도 없지는 않다.
최근에 Heinrich Hackmann : Der Zusammenhang zwischen Schrift und Kultur in China(1928)를 읽어보았다. 중국인이 너무나 한자를 소중히 길러냈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재미있게 논하고 있다.
현대 물리학은 확실히 수학을 응용한 덕분에 보통을 넘는 진보를 이루었다. 이런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결과로서 수학과 관계없는 자연현상은 못 본 척하거나, 수학을 적용할 수 있도록 자연을 무리하게 왜곡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러한 폐해가 심해지면 오히려 과학 본연의 진전을 저해하지는 않는가.
모든 자연과학은 결국 기재의 학문이다. 수학적 해석은 실로 과학의 수학적 기재에 쓰이는 가장 편리한 국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로는 기재할 수 없지만 다른 언어로 기재할 수 있는 흥미롭고 유익한 현상은 셀 수 없이 많다.
도구를 너무나 중시하여 본연의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 이것도 명심하여야 한다.
덧붙여서, 이전에 일본어를 잘하고 한자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어느 독일인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한자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틈만 나면 그 글자를 쳐다보는 것이라고 한다. 과연 저 끈기 있는 독일인 중에 일본어를 잘하고 문자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독일인이 대체로 수리과학에 뛰어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끈기와 집요함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드물기는 하지만 독일인의 논문 중에 얼토당토않은 공허한 생각을 위압적인 수식으로 무장한 것이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뭐라고 해도 모든 언어 중에서 수학의 언어와 같이 한번 붙잡은 실마리를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놓지 않고 사고의 전개를 계속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보통의 언어는 어느 정도까지는 이어지더라도 개에게 쫓기는 토끼의 발자국처럼 때때로 연결이 어설퍼진다. 생각건대 이것은 일반적인 언어의 발달이 아직 미숙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철학 전성기의 언어에 비해서 20세기 사상계의 언어는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조금밖에 진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보다 더욱 진보하지 못할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의 진행을 수학에서 계산의 진행처럼 틀림없이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에 가까워지도록 우리의 언어, 나아가 사고의 방식을 성장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가, 되지 않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문제이다.
내가 '수학과 어학'이라는 제목으로 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런 어려운 문제를 다룰 생각은 없었다. 단지 어학을 좋아하고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들과 수학을 좋아하고 어학을 싫어하는 학생들에게 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의외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려서, 좋아하는 것에 대한 방법을 이용해서 싫어하는 것을 정복하는 과정을 암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이 결국 토끼의 발자국처럼 의외의 방향으로 뻗어 나가서 이런 글이 완성되어 버렸다. 이것은 역시 인간, 아니 나의 언어가 불완전한 탓으로 돌리며 독자의 관용을 빌기로 한다.